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젤레나 우크라이나 (문단 편집) === 건국 === [[1917년]] 러시아에선 [[러시아 혁명|10월 혁명]]이 일어났고 이후 [[11월 17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 건국될 때까지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이렇다 보니 머나먼 극동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되었고, 극동에 거주하던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 제국을 대신해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해줄 새로운 국가인 '극동 우크라이나 공화국' 수립을 처음으로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11월 15일 기초적인 행정체계를 수립하고 이듬해인 [[1918년]] 건국을 위한 여러 회의가 열렸다. 1918년 2월부터 4월까지 세차례에 걸친 회의를 개최했고 독자적인 군대를 편성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 와중에 [[일본 제국]]의 지원을 받아 [[볼셰비키]] 적군 세력과 대치하던 [[카자크]]족 출신 백군 사령관 [[그리고리 세묘노프]][* 명목상으로는 [[전러시아 임시정부]] 소속의 백군 지휘관이지만, 자기 세력권을 마음대로 움직였고, 열차 약탈과 학살을 자행하여 '극동의 도살자'라고 불리었다.]가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하며 젤레나 우크라이나를 지지하였다. 이후 내부 혼란을 수습한 소비에트 정부는 [[1920년]] 4월 6일,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를 위시한 서유럽의 백군 지원 세력에 전념코자 [[대동아 공영권|극동에서 치고 올라오며]] 백군을 비롯한 반혁명 세력을 지원하는 일본 제국을 막아설 [[완충국]]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한편 일본 제국도 무분별한 확장을 경계한 유럽으로부터 각종 압박을 받아 제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현지인들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그 자리에 [[극동 공화국]]이 설립되었고, 이를 계기로 일본군들은 시베리아 진출을 단념하고 극동에서도 철수하기 시작했다.[* 만약 일본 제국이 완충국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내륙까지 진출했다면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위기 고조 및 서유럽 열강과의 대립도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한편 신생 소비에트 정부는 선진자본주의 국가와의 경제 협력을 통해 내외적인 문제들을 해결코자 하였고, 때마침 병력을 물림으로서 적대 의사를 보이지 않은 일본 제국은 아시아 지역의 선진국이었으므로 소비에트 정부는 일본 제국과의 정치, 경제적인 관계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극동 우크라이나인들은 머나먼 모스크바에서 자신들을 빼놓고 일방적으로 결정지은 걸 인정하지 않고 동년 [[4월 11일]] 독자적으로 건국 선언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